[충청뉴스 유규상 기자] 독일의 도시를 걷다 보면 곳곳에서 '공립 음악학교(Musikschule)'를 만날 수 있다. 이 음악학교는 특정 계층의 사설 교육기관이 아니라, 지방자치단체와 주정부가 운영비를 지원하는 공공 기관이다. 아이들부터 청소년, 성인, 노인까지 전 세대가 악기를 배우고 합주를 경험한다. 운영비와 교사 인건비를 공공이 지원하기 때문에 누구나 저렴한 비용으로 참여할 수 있다. 음악은 전문가의 전유물이 아니라 시민 모두가 누려야 할 권리라는 인식이 사회에 뿌리내려 있는 것이다.
이와 비슷하게, YMCA는 전 세계적으로 청소년과 노인을 위한 미술·공예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예컨대 독일의 CVJM(YMCA Germany)에서는 세대 통합을 목적으로 그림·공예 활동을 제공하고, 캐나다 YMCA에서는 청소년 대상 아트 워크숍과 노인 미술치유 수업을 함께 진행한다. 미국 YMCA도 노인을 위한 액티브노년 (Active Older Adults) 프로그램 속에 그림·공예 활동을 포함하고 있다. 이러한 프로그램에서 노인은 삶의 기억을 그림으로 풀어내며 치유와 활력을 얻고, 청소년은 불안과 감정을 표현하며 자존감을 키운다. 세대가 같은 공간에서 창작을 나누는 경험은 미술을 단순한 취미가 아니라 세대 간 공감과 공동체 회복의 매개로 만든다.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여러 도시에서는 정부의 지원을 받아 작은 소도시. 마을에 있는 작가 아틀리에가 개방된다. 도자, 조각, 판화, 사진 등 다양한 수업이 작가 작업실에서 열리고, 주민들은 일상의 연장선에서 예술을 체험한다. 작가들은 안정적인 창작 환경을 확보하고, 주민들은 직접 창작 과정에 참여하면서 예술을 자신의 삶과 연결한다. 이는 정부가 단순히 전시회나 공연만 지원하는 것이 아니라, 창작 공간 자체의 유지와 개방을 제도적으로 보장한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캐나다 온타리오주의 소도시에서는 도서관이 저녁이면 연극 무대로 바뀐다. 주민들은 희곡을 함께 읽고, 퇴근 후 늦은 시간에 모여 연습하며, 직접 무대에 선다. 관객과 배우의 경계가 허물어지고, 지역민 모두가 주체가 되는 이 마을 연극은 문화 소외 지역에서 공동체의 자존감을 회복하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도서관과 극장이 같은 건물을 공유하는 사례는 문화시설이 생활 속에서 어떻게 변용될 수 있는지를 잘 보여준다.
이러한 사례들은 공통적으로 말한다. 기초예술은 단순히 교육의 보조물이 아니라 삶의 근간이라는 점이다. 음악을 배우고, 그림을 그리고, 몸짓으로 표현하며, 무대에 서는 경험은 인간의 감각과 정서를 일깨우고 창의성을 확장한다.
오늘날처럼 AI와 로봇이 인간의 기능을 대체하는 시대에, 인간 고유의 창의력과 감수성은 기초예술을 통해 더욱 분명하게 드러난다. 초고도화된 기술이 사회에서 인간의 영역을 대신할 때, 우리가 고민하는 지점은 산업과 경제적 영역뿐만 아니라 일상에서 겪게 되는 ‘삶의 질’과 인구 소멸, 경제와 산업적 변화에 따른 기회의 박탈, 노쇠된 도시와 삶의 근간을 흔드는 기반 붕괴의 두려움은 그저 먼 미래의 닥칠 일이 아니다.
그저 자본과 기술의 끊임없는 혁신만이 우리의 현실을 보전할 수 있을 거란 막연한 믿음보다, 우리가 닥친 현실에 인간의 감성과 창의성을 확장하는 일을 견고하게 마련해야 한다는 깨달음이 더 크다, 그러나 세계적인 K문화의 성공과 확장에서 진정한 삶을 근간으로 한 우리의 예술, 문화의 현실은 다르다.
지역의 미술관과 공연장은 여전히 외주기획사의 프랜차이즈 공연을 사오는 것에 급급하고, 전문가도 아마추어도 아닌 몇몇의 지역 예술가에게 기회가 집중되어 있으며, 생활예술가나 주민, 청소년과 노인이 참여할 무대는 턱없이 부족하다. 기초예술은 학교 교육에서 끝나거나 동호회 차원에서 머물고, 사회적 확장으로 이어지지 못한다. 기초예술이 사회적 기반으로 기능하기 위해서는 발표와 전시의 민주화가 반드시 필요하다. 그러나 이런 과정에서 스스로의 역량을 독창적이고 창의적인 것으로 심화시키고, 집중하는 기초예술의 창작과정에 대한 집중과 고도화가 필요하다. 이것은 단순한 교육적 차원을 넘어서 연구와 발표의 과정에서 지역문화를 형성에 자율적인 학습 과정의 다분화와 다양화를 갖추고 ‘열림과 나눔’의 형식들이 실험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기초예술교육의 다양한 심화의 과정들을 공공에서 지원하고 만들어 내어야 하며, 그 발표와 실험의 장을 기획자+예술가+학습자를 10대부터 70세까지 다양한 계층과 필요를 나누어 학습할 수 있는 창작스튜디오, 프로그램, 공간을 만들고, 그 학습을 지원해야 한다. 이 과정은 지역, 도시가 스스로가 가진 문화, 예술 역량을 무시하지 않고, 새롭게 발굴하고 개발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그리고 다양한 문화와 예술의 수요들을 기초예술과 공동체 예술로 재구성하는 것이 중요하다.
영국의 저명한 미술상인 터너상(Tuner Prize)를 수상한 어셈블그룹(Assemble Group)은 그러한 기초예술, 창작과 공동체 예술의 가능성을 도시 재생과 전문가+주민 공동체를 통해서 구현했다. 우리에게 이 모델이 시사하는바는 널리 알려졌지만, 현재 우리 지역사회에 연결하는 방법은 아직도 모연하다.
필자의 생각에서는 우리의 일상에서 만나는 문예회관, 도서관, 미술관, 박물관을 ‘모두를 위한 예술 공간’으로 만드는 방법을 통해서 시도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한다. 이는 무조건 문을 열어두는 개방이 아니라 문화정책과 방향을 장르적 콘텐츠 중심에서 교육적 가치, 새로운 실험성과 예술 집중도를 최우선으로 하는 전문적 기획과 연출이 뒷받침되면서도, 지역예술가와 주민들의 참여의 문턱을 낮추는 구조여야 한다. 생활예술과 아마추어 창작을 존중하지만 그 발표의 장에서 만나는 기획적 측면은 사회적 언어로 번역하고, 새로운 창의적 에너지로 환원하는 전문적인 기획이 필요하다. 그저 지역의 문화예술의 발표와 전시의 장에서 일어나는 마르지 않는 페인트로 뒤덥힌 전시나 보이기식 퍼포먼스는 이제 그만해야 한다. 게다가 공연장과 전시장에서 현수막과 내빈소개를 늘어놓는 듯한 것은 문화의 장을 싸구려 행사장으로 전락하게 만드는 주범이다.
진정한 문화, 예술의 창의성과 독창성, 시민의 창의력을 담아내는 예술공간, 그것들이 새로운 가능성으로 확장되고, 개인적 체험은 공유 가능한 사회적 경험으로 전환되는 다층적 순환구조의 문화민주주의 시작은 우리가 지금 가장 필요로 하고, 지역을 통해 구현할 수 있는 실질적인 전략이 되어야 한다.
결국 질문은 이것이다. 누구를 위한 모두의 예술인가? 그 답은 경제적 자원이나 문화적 자본에 따라 차별받는 이들이 아니라, 문화적 기회에서 배제된 지역, 목소리를 잃은 세대, 고립된 개인에게 있다. 예술은 일부 전문가의 업적이나 시장 소비의 대상이 아니라, 인간이라면 누구나 누려야 할 보편적 권리다.
그리고 다시 물어야 한다. 우리가 예술의 목적을 무엇을 위한 것으로 창발하려 하는가? 예술은 단순한 아름다움의 탐구나 소비의 대상이 아니라, 인간 고유의 창의적 에너지를 삶과 사회 속에서 새롭게 발현시키는 힘이다. 기초예술은 그 출발점이며, 인간의 감각과 정서를 사회와 연결하는 가장 근본적인 통로다.
지방 균형발전 수도권/광역 중심의 문화집중정책에서 벗어날 해법은 '문화서비스기획' 으로의 수요자. 생활권 중심의 예술창작지원정책을 활용해야한다. 그것을 위해서 앞으로의 기초예술 진흥은 마을과 도시 속에서 삶을 창의하는 기반을 제도적으로 마련하는 일이어야 한다. 발표와 전시가 가능한 열린 제도, 주민 누구나 참여할 수 있는 공간, 이를 운영할 공공 기관을 마련해야 한다. 정부와 지자체는 군 단위, 마을 단위까지 세심히 살피며, 생활예술과 기초예술이 일상 속에서 이어질 수 있도록 적극 지원하는 정책을 추진해야 한다.
✦ 이로써 기초예술은 교육의 부차적 영역을 넘어, 인간다운 삶을 지탱하고 개인의 삶의 질을 향상하는 문화적 민주주의. 지역과 개인의 사회적 연대를 회복하는 가장 강력한 기반이 될 수 있다.

